2026-04-16
김동진류 대금산조를 공부하며
이건준 · 대금 연주자
국가유산진흥원의 「2024 화음(和音)」 무대에서 저는 김동진류 대금산조를 연주했습니다. 그 무대는 제게 한 유파를 공부한다는 것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한 자리였습니다. 산조는 유파마다 가락의 짜임과 표현의 어법이 다르고, 한 유파를 공부한다는 것은 그 어법의 문법을 몸에 들이는 일입니다.
유파를 공부한다는 것
유파 공부의 첫 단계는 철저한 모방입니다. 가락의 음 하나, 시김새의 각도 하나까지 그대로 따라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단계에서 자기 해석을 서두르면 유파의 어법을 배우기 전에 자기 습관으로 덮어 버리게 됩니다. 저는 이 모방의 시간을 답답해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문법을 익히기 전에는 문장을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방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질문의 단계가 옵니다. 왜 이 대목에서 소리를 눌렀는가, 왜 여기서는 시김새를 아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답은 가락 안에 있을 때도 있고, 장단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도 있습니다. 이 질문들을 통과하면서 가락은 외운 것에서 이해한 것으로 바뀝니다. 이해한 가락만이 무대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장단 위에서 짜인 설계
김동진류 산조를 공부하며 제가 특히 집중한 것은 바탕 전체의 설계였습니다. 진양조에서 소리를 어떻게 쌓아 두는가에 따라 중모리의 걸음이 달라지고, 자진모리에서 풀어낼 수 있는 힘의 총량이 달라집니다. 산조는 대목마다 아름다운 음악이지만, 동시에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건축입니다. 유파의 개성은 개별 가락만이 아니라 이 배분의 방식에도 깃들어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연습도 대목 연습과 전바탕 연습을 오가며 진행했습니다. 대목만 다듬으면 건축이 사라지고, 전바탕만 돌리면 세부가 무뎌집니다. 부분과 전체 사이를 계속 왕복하는 것이 산조 공부의 실제 모습이었습니다. 어느 한쪽에 오래 머물면 반드시 다른 쪽에서 문제가 자랐습니다.
무대가 가르쳐 준 것
「화음」 무대를 준비하면서 저는 연습실의 산조와 무대의 산조가 다르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무대의 공간, 그날의 공기, 장고와의 호흡이 연습실에서 정해 둔 계획을 조금씩 움직입니다. 준비한 설계를 지키되 그 순간의 소리에 반응하는 것, 산조가 요구하는 것은 그 둘의 공존이었습니다. 굳은 계획도, 무계획의 즉흥도 산조의 답이 아니었습니다.
무대를 마치고 내려왔을 때, 저는 이 유파를 이제 막 알기 시작했다는 감각을 받았습니다. 한 번의 무대는 공부의 완성이 아니라 공부의 중간 보고에 가깝습니다. 같은 바탕을 다시 처음부터 들여다보면 전에 보이지 않던 결이 보입니다. 산조 공부에 끝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저는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유파를 공부한다는 것은 결국 앞 세대의 시간과 대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락 하나하나에 그것을 만들고 다듬어 온 시간이 쌓여 있습니다. 저는 그 시간을 정확하게 배우고, 언젠가 제 시간을 조금 보태고 싶습니다. 그것이 전통을 잇는다는 말의 실제 의미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