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07
소리가 나오지 않는 날
이건준 · 대금 연주자
연주자에게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손가락이 문제가 아닙니다. 같은 악기, 같은 연습실인데 어제까지 있던 소리의 중심이 사라져 있는 날입니다. 음은 나지만 소리가 비어 있고, 불면 불수록 더 멀어집니다. 이런 날을 처음 겪었을 때 저는 꽤 흔들렸습니다. 지금은 이런 날이 연주 생활의 일부라는 것을 압니다.
원인부터 찾으려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소리가 안 나오면 그 자리에서 원인을 찾으려 했습니다. 입술의 각도를 바꿔 보고, 청을 다시 만지고, 자세를 고치면서 몇 시간을 보냈습니다. 대부분은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었습니다. 조급한 진단은 멀쩡한 부분까지 의심하게 만들고, 의심은 몸을 굳게 합니다. 굳은 몸에서 좋은 소리가 날 리 없으니 악순환이 완성됩니다.
지금 저는 그런 날이면 계획을 바꿉니다. 곡 연습을 접고 가장 기초로 내려갑니다. 편한 음역의 롱톤을 소리에 대한 판단 없이 그냥 붑니다. 좋다 나쁘다를 평가하지 않고 숨이 지나가는 감각만 지켜봅니다. 신기하게도 평가를 멈추면 소리가 조금씩 돌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리는 다그치면 숨고, 기다리면 옵니다.
몸의 신호일 때가 많다
돌아보면 소리가 사라진 날의 상당수는 몸이 보낸 신호였습니다. 잠이 부족했거나, 전날 무리하게 연습했거나, 신경 쓰는 일이 있어 어깨가 굳어 있었습니다. 대금은 몸으로 부는 악기라서 몸의 상태가 소리에 그대로 번역됩니다. 소리가 이상하면 소리를 고치기 전에 몸의 장부를 먼저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연습을 줄이는 것이 최선의 연습이 됩니다. 한 시간만 가볍게 불고 악기를 내려놓는 결정은 게으름이 아니라 판단입니다. 예전에는 연습을 줄이면 불안해서 빈 시간을 억지로 채웠습니다. 지금은 회복도 훈련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내일의 세 시간을 위해 오늘의 두 시간을 접을 줄 알아야 합니다.
사라진 소리가 가르쳐 주는 것
소리가 나오지 않는 날은 역설적으로 제 소리의 구조를 가르쳐 줍니다. 잘 되는 날에는 모든 것이 뭉쳐서 움직이기 때문에 무엇이 무엇을 받치고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무너진 날에는 어느 기둥이 빠졌는지가 드러납니다. 아, 내 고음은 이 부분의 지지에 기대고 있었구나 하는 발견은 대부분 나쁜 날에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날들은 무대에 대한 준비이기도 합니다. 무대에서 최상의 컨디션을 보장받는 연주자는 없습니다. 칠십 퍼센트의 몸으로도 무대를 감당하는 능력은, 칠십 퍼센트의 날들을 연습실에서 어떻게 보냈느냐에서 나옵니다. 나쁜 날의 연습이야말로 무대를 위한 실전 연습인 셈입니다.
이제 저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아침에 예전만큼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날은 지나간다는 것을 경험이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냥 지나 보내지는 않으려 합니다. 사라진 소리가 남기고 간 질문을 적어 두고, 소리가 돌아온 날에 그 질문을 다시 꺼냅니다. 나쁜 날을 공부로 바꾸는 것까지가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